산을 좋아한다
산을 좋아한다.
한의학을 하고, 글을 쓰는 작업을 하다보니, 그냥 뇌의 회전을 느리게 하고 산에 안기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건 나에게 집중과 이완의 두가지 축인셈이다. 또 나에게 어머니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하다. 지쳐있을때 마냥 따스한 햇살과 포근한 숲내음을 안겨줄땐 어머니의 품 같기도 하다. 목표한 지점을 향해 가다가 머뭇거릴 땐 나태한 나를 꾸짖는 아버지같기도 하다.
막 즐거워서 뛰어다닐때도, 고민이 많아 혼자 산을 다닐때도, 봄기운을 느끼고 싶을때도, 가을의 끝자락을 잡고 싶을때도 그저 말없이 품어준다.
기천문을 함께 했던 승호형(부산 동산한의원 원장)을 만나면서 산을 알게 되었다.인연은 스치듯이 시작되지만, 서서히 가슴 속에 크게 자리를 잡는다. 승호형과의 인연의 시작은 한의대 1학년 조촐한 술자리가 시작이었는데, 이 형이 재미있어 2차,3차를 따라가고 형도 첫날부터 지독하게 자길 따라오는 특이한 동생이 어떤 녀석인가 궁금했는지 내 자취방에 와서 밤을 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승호형은 수련에 뜻을 두어 한의대 입학 전에 이미 기천문의 사범님이었는데, 형님을 따라 기천문을 입문하고 함께 한의대시절을 동아리를 만들고 매일 아침 수련을 하였다. 형님은 나의 하나의 롤모델이었다. 이분은 대단한 애주가였다. 학창시절 거의 매일 술을 마셨는데, 이분의 애주는 단순히 부어라 마셔라가 아니었다. 장난도 하고 농담을 하다가 어느순간 삶의 이야기를 하고 한의학의 이야기를 하고, 기분이 좋아지면 춤을 추고 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다시 운동장에 나와 기천문 수련을 하였다. 떠오른 태양을 보며 내가신장( 기천문의 기본 자세, 기마자세랑 비슷한 자세에서 팔을 올려 인체의 기의 순환을 한다.)을 하며, 소도세로(소가 쟁기를 끄는 자세, 육합단공 중 하나) 운동장을 밭을 갈듯이 다리가 터질듯한 기분을 느끼며 수련을 했다.
내가신장을 하며 앞으로 둥글게 감싸안은 손가락 사이로 아침 태양빛이 들어올때, 감긴 눈꺼풀에도 빛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눈은 감았지만, 빛이 나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새벽녘 밤새 가라앉은 기운이 조금씩 약동하면서 올라오는 풀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새들도 깊은 산속 어딘가에서 재잘거린다. 수련을 지도하는 형은 지천합틀무(내가신장을 할 때 하는 구호-內家伸掌, 보통 30분 길게 할때는 한시간을 하기도 한다)를 선창하면, 우리들도 아랫배에서 묵직하게 올라오는 목소리로 크게 소리친다.
6시에 수련을 시작했는데, 수련에 참석하기 위해선 5시에 일어나서 학교로 와서 준비해야 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를 잘 시작했다는 뿌듯함으로 아침부터 승리한 느낌이었다.
저녁이 되면 형이랑 수련을 같이하는 도반들이랑 밥을 먹었다. 먹다가 마음이 맞으면 술한잔을 하고, 또 마음이 맞으면 가게에서 소주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고 캠퍼스 한자락에 앉아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했다. 한의학의 이야기, 기천의 이야기, 풋풋한 연애에 대한 이야기들, 그러다가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고 기천무(기천동작을 하면서 춤을 추는것, 그러다가 막춤을 춘다. 뭐 춤이 별거인가. 자유로움을 막춤이든 기천무이든 표현하면 되는 거지.)를 춘다. 그럴때면 아 살아 있구나 하고 마음이 꽉 차는 느낌을 받곤 했다.
형은 주역에도 뜻을 품었다.(이후 3년 뒤 형을 따라 나도 주역 통강에 도전했다) 그래서 형다운 방식으로 1년을 지리산 자락 골짜기에 터를 잡고 주역을 공부하고 매일 지리산의 봉우리들을 올랐다. 이 때는 내가 기천문동아리 회장이 되었었고, 동아리 회원들을 데리고 형이 공부하는 곳에 와서 종종 1박2일 수련을 하고 칠선계곡을 누비었다.
“형 내년에는 천왕봉에 함께 가요”
형은 눈빛으로 그걸 뭘 묻나 당연히 같이가자고 대답을 했다. 오래 함께 수련을 하다보면 서로의 리듬과 주파수가 맞아지게 된다. 이건 꼭 수련이 아니더라도 오랜 친구, 가족들도 그렇게 된다. 여차저차 다음해는 지리산 산행도중 장대비가 내리며 중도에 하산하며 형님이랑 천왕봉은 함께 못가고 이후 다시 방문하여 나머지 구간을 완주했다.
기천문은 산중무예라고 칭하는데, 우리나라에 산이 많기도 하지만, 산자락에서 산의 기운을 받으며 수련을 많이 한다. 지리산에서 계룡산에서 대구 앞산에서 땀방울을 함께 흘렸다. 어느샌가 나에게도 산이 가슴에 들어왔다. 혼자서도 산을 종종 오르기 시작했다. 동네산에서부터 지리, 설악의 골짜기들을 누비었다. 겨울 소백에 올랐을 때는 목소리도 묻히는 거센 바람이 너무 좋았다. 눈에 누워 하늘을 보다가 폰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한번 가슴에 들어오고 난 뒤는 거침이 없었다. 졸업후 돈을 좀 벌고나서는 네팔에 갔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가고, 한국에서 볼수 없었던 저 멀리 7000-8000미터 급의 설산을 만났을때의 떨림과 흥분은 잊을 수가 없다. 멀리 보이던 안나푸르나가 한걸음씩 묵묵히 걸어가며 조금씩 다가왔다. 길을 따라 안보이는 듯하더니 저 골을 넘어섰을때 다른 각도의 얼굴을 보여준다. 해가 질때 불타고, 해가 뜰때 다시 불타올랐다. 달이 밝을 땐 달빛이 설산을 비추었고, 인공의 빛이 없는 그곳에서 은하수가 보였다. 꽤 추웠지만 견딜만 했다.
MBC(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서 ABC로 가는 길은 주변 360도 모두 설산이었다. 4000미터 고도에 올라오니 숨이 차왔다. 속도가 느려졌다. 하지만 가슴은 기쁨에 터질듯했다. 저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큰 산앞에선 한점으로 보였다. 웃통을 벗고 춤을 췄다. 태극기를 꺼내 마치 고산을 정복한 등반가처럼 포즈를 잡았다. 그 분들이 보기엔 웃음이 나올 장면이겠지만, 처음으로 8000미터의 산을 만나고 이 곳을 걸어가는 나 자신이 좋았다. 내가 가고픈 길 위에 서 있었다.
산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산에서 만났던 사람과 사랑, 산에서 마주쳤던 희열 그리고 문득 찾아오는 외로움… 산행지도와 산 가이드 정보는 이미 넘쳐난다. 덥수룩한 한 사내가 산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는 그런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 2025 전재규. 본 글은 저작권 보호를 받습니다. 필요한 경우 출처를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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